0
 705   47   1
  View Articles

Name  
   관리자 (2003-03-05 18:49:19, Hit : 7108, Vote : 1646)
Homepage  
   http://www.poongsoo.co.kr
Subject  
   [SK는 풍수적으로 당연한 결과]
SK는 풍수적으로 당연한 결과

본 연구자 저서에 예견 입증…… 기업 망하면 나라 걱정 조언에 가족 회의 까지.

SK 그룹의 장래는 고 최종현 회장 부부를 어떤 방법으로 장례를 치르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한 연구자는 기업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만큼 기업이 발전해야 나라가 발전 한다는 소신으로 당시 장례 위원장(SK 구조 조정 본부장)측에 확고한 장례 절차를 건의 한 바 있으나 연구자의 조언을 간과하여 일어날 일을 걱정하던 차에 1월 17일 뉴스를 듣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본 내용은 연구자의 98년 저서 “천년 만에 한국이 세계를 지배한다” 에 SK에 대하여 이미 예언하고 기록한 것이다.

1995년 가을 이었다.
평택에 허OO씨는 수원 장안 대학교 앞에 산이 있는데 묘자리나 집터로 좋은 자리가 있는지 감평을 요청하여 그곳을 가게 되었다.
허씨가 지목한 자리의 산을 감평한 후 그는 바로 저기 보이는 묘지가 어떤지 가 보자고 하였다.

누구의 묘인지 영문도 모르고 가 보았으나 비석도 없고 4기의 묘지가 한 내룡에 지그자그로 엇비슷하게 있었다.
묘지를 중심으로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등 풍수적으로 좋은 길지 였다.
물형에 비교하여 주작의 형상이 손에 잡힐 듯 적당히 형성되어 있어 큰부(富)의 발복이 빠르게 전달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묘의 좌향이 장손보다 차손이 발전 하도록 맞혀 있어 차손이 큰부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또한 貴星이 뒤에 있지만 묘지에서 보이질 않고 內堂이 넓지 못하여 인물은 없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당시 연구자도 놀란 것은 묘지 15M아래 큰 명당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자리는 SK가 현재보다 10배 이상 더 많이 발전하는 곳이며, 뒤쪽에 귀성이 보여 자손 중에 큰 인물이 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허씨는 정확한 감평을 높이 평가하고 최종현 회장 조상 묘라고 하며 연구자를 시험 했다고 했다.

97년 부인 박계희 여사가 먼저 사망하여 연구자가 발견한 명당으로 모실 줄 알았는데 장례 3일 후 현장을 가보니 정혈이 아닌 (정혈은 5~6M)곳에 매장 하였기에 3년이 지나면 자손이 서서히 잘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저서(60쪽)에 화장은 해서 되는 화장이 있고 안 되는 화장이 있다라고 기록 하였으며 사망 시 바로 화장은 기가 발산하기 전이라 좋은 것이나 매장 했던 묘(조상묘)는 이미 기가 발산 했기에 화장하면 자손에게  큰 화를 당한다고 기록 되어있다.

따라서 최회장은 사망 시 바로 화장 했으므로 유해와 자손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않지만 문제는 박여사 유해의 영향이다.
    첫째, 매장 시 정혈(온혈)에 모시지 못한 것도 악 영향이지만
    둘째, 매장 유해를 다시 파서 화장 했으므로 자손에게 큰 화를 불러오게 한 것이다.

연구자는 SK에 대하여 풍수 학문적으로 엄청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 할 것에 이어 나라 경제에 큰 문제가 될 것을 예견하여 최회장 사망 당시 연구자의 행적을 밝힌다.

※ 연구자는 최회장 사망 후 장례 전 전화로 장례 위원장에게 고인의 유언대로 화장을 발표하였지만 SK가 현재보다 10배 이상 발전 할 수 있는 명당이 조상묘 아래 있다고  설득하여 조언에 따라 가족 회의를 하였으나 이행 되기 어렵다고 하며 전화를 끊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업의 앞날은 불을 보듯 하고 있는 연구자는 화장하게 놔둘 수 없다는 생각에 직접 찾아가 설득을 하기로 하고 당시 길을 몰라 평택 시의원 김남옥씨와 같이 밤11시에 워커힐 호텔 뒤 최회장 자택 분양소를 찾아갔다.

다시 장례 위원장을 직접 만나 설득에 들어 갔다.
고인은 화장을 유언하였으나
“풍수에는 전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SK가 발전해야 나라에 큰 영향을 주는 게 아니냐” 등
“두 번만 기회가 있어도 이렇게 사정하지 않는다.
화장하면 끝장이기에 지방에서 밤중에 찾아오게 됐다”는 말을 듣고 기다려 달라 다시 가족회의를 해보겠다고 하더니 결론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더 놀란 것은 최회장만 화장 하는 줄 알았는데 매장했던 부인 묘까지 파서 화장하여 다시 매장했다는 말에 할말을 잊게 하였다.
당시 노력은 하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연구자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 당시 장례 지사는 최창조 교수라고 함.

Prev
   [이사는 吉日(길일)보다 터가 더 중요하다.]

관리자
Next
   [“청와대 이전 장소 흉터라면 목숨 걸고 반대 할 것”]

관리자


Copyright 1999-2023 Zeroboard / skin by Zetyx